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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의 이야기가 가득한 존중문화도시 도봉

  양말로 피운 꽃길
  찬바람을 가르는 창2동 우이천변 가로수길. 그 사이에서 알록달록한 색과 모양으로 단장한 120여개의 나무 옷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짚이나 이엉으로 덮였던 나무 옷이 그래피티 니팅(Graffitiing:공공시설물에 털실로 뜬 덮개를 씌우는 친환경 거리 예술)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뜨개질로 만든 나무 옷들은 겨울철 추위와 병충해를 줄이고, 다양한 무늬와 색채로 도시 미관을 살린다.  


▲ 창2동 양말거리 
  
  나무 옷들은 지난 9월말 창2동 자치위원회 문화축제분과에서 마을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업한 결과물로서, 손뜨개질 위에 양말목으로 만든 꽃을 장식한 것이라고 한다. 매년 봄에 개최되던 ‘벚꽃 축제’ 중 함께 실시되던 ‘양말거리 조성 사업’이 코로나로 인해 뒤늦게 진행된 것이다. 60여명이 넘는 마을 주민 분들의 기부와 한 땀 한 땀의 봉사로 이루어진 행사였다.  
 
  “우리 창동에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벚꽃축제’ 있잖아요. 그것도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지금은 엄청 커져 버렸어요. 이후에 주민들과 함께 ‘이번에는 양말거리도 우리 창동에 한번 만들어 보자’해서 2년 전부터 해오던 일들을 이렇게 자꾸 키워나가게 되었어요.”
  그 중심에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셨던 마을 주민 분들과 사업의 소재인 양말목을 공급해 주셨던 주민자치협의회 대표 강대훈 선생님이 계셨다. 그는 창2동 자치위원회에서 13년 이상 꾸준한 활동을 해 오신 잔뼈 굵은 주민이기도 했고, ‘대운섬유’ 공장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 창2동 주민자치협의회 회장 강대훈 선생님

  양말 인생의 시작
  선생님과 도봉구의 인연은 ‘양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척에게 일자리를 소개 받아 간 곳이 광진구에 있는 양말 공장이었다. 18세 소년의 ‘양말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근로시간이 오전 8시에 시작해서 저녁 10시까지 풀타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루 온종일 밤낮없이 공장에서 생활한 셈이다. 지금이야 노조다 뭐다 해서 근로환경이 향상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한 달에 한 번 쉬면 잘 쉬었다고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때는 뭐 육체적으로 힘들고 그랬지만 그래도 꿈은 있었어요. 내가 열심히 살면 나중에 집 장만도 하고, 공장이라도 한번 하고 싶다 그런 꿈이 있었어요.” 

  고된 노동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데는 같은 방을 쓰던 선배의 도움이 컸다고 선생님은 회상하셨다. 그 분은 기술을 알려주는 선배이자.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 주신 스승님이셨다고 덧붙이셨다.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꼭 찾아뵙고 있다고 한다. 선생님의 성공을 밑받침 해준 것들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노력과 꿈, 그리고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양말 특구 ‘창동’ 
  선생님이 창동에 오신 것은 23년 전쯤이다. 공장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성북구에서 창동으로 이주하셨다. 
  1960년대, 국가주도형 산업화전략이 진행되면서 도봉구 일대에는 미원이나 샘표간장 같은 굵직한 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80년대 말, 그 공장들이 속속 타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그 자리에 아파트와 주택이 생겨나고 소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비교적 싼 건물 임대료 덕분에 공장 운영자들은 창동이나 방학동으로 들어와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선생님도 그 흐름을 타고 창동으로 오셨다.  


▲ 양말제조과정 (양말생산, 양말가공처리)
 
  양말 공장은 제조 공정의 특징 때문에 더욱 밀집했다. 양말을 만드는 공정은 총3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원사 입고 후 필요한 원사를 편직기에 걸고 봉조작업(원통형으로 트여져 있는 양말 앞트임을 불편하지 않게 이어주는 작업. 초기에는 일일이 손작업을 거쳤음)을 한다. 이후 가공처리, 자수 및 부자재 세팅, 그리고 택 작업과 포장을 거친다. 이러한 단계별 과정이 각 공장 의 하청작업으로 맡겨져 있다. 때문에 공장들이 함께 모여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도봉구가 전국 양말 생산의 30~40%를 점유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창동에 양말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양말 공장은 모두 하나에요. 우리 도봉구에 만 해도 뭐 한 250 군데 정도 되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우리가 경쟁자이기 보다는 같이 가야 된다는 생각... 경쟁한다고 경쟁이 되는 게 아니에요. 양말 자체는 서로 협력하면서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협동조합을 만든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만든 것이에요.”

  도봉구에는 현재 이들을 결합하는 두 가지의 협의체가 있는데 ‘중앙 양말 연합회’와 ‘양말 협동조합’이 그것이다. 과거 친목 도모 위주의 연합회에서 온라인으로의 새로운 판로와 방향을 모색하고자 만든 것이 최근의 ‘도봉구 양말 협동조합’이다. 강대훈 선생님은 그 조합의 대표다. 조합 대표로서 선생님의 바람은 앞으로 양말 생산이 더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에서 ‘양말 콘텐츠’가 활약하는 것을 꼽으셨다. 미래에는 양말타운이나 양말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포부도 세우고 계신다고 귀띔해 주셨다.

  창동 살이 ‘세상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한 10년 쯤 된 거 같아요. 우리는 생이 끝나면 집사람이나 저나 있는 거 다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봉사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어요. ‘세상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올 3월에 화재 피해를 입어 그 손해를 메우느라 동분서주 하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본인 일을 돌보는 데만 몰두하지 않으신다. 양말 조합 대표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더해, 마을 일에도 본인 일처럼 앞장서고 계신다. 12년 전부터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창2동에 주민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건의를 해왔었고, 수차례 노력한 결과 창림초등학교 앞과 창동시장 내에 주민을 위한 복합 공간 건립이 예정됐다. 희망했던 것보다는 규모도 작고, 위치 선정 등 개선해야 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창2동 주민 한분 한분이 마을을 함께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고, 이런 마음들이 함께 모여 조금씩 좋은 마을을 이루어 나간다고 생각하니 절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 창2동 우이천변

  “저는 여기 창2동에서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살 거 같아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창동에 살면서 제일 좋은 것은 이웃 간에 서로 아껴 주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며 본 풍경 같은.. 그런 게 창2동에는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서울시 어느 마을을 가도 그런 모습은 찾기 힘들더라고요. 우리 창동에 오면 그런 모습이 있어서 여기서 계속 살 거예요.”

  창동에서 계속 사실 계획이냐는 물음에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장주가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년은 양말을 통해 창동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공장 운영자로, 협동조합 대표로, 자치위원회 회장으로 살아오셨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꿈보다 더 멋진 일들을 이루신 것은 아닐까. 나아가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내실 것이란 기대도 하게 된다. 여전히 많은 꿈과 포부를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저는 양말이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요.” 

<기록 정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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