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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 - 공익활동가 박은희
박은희 님을 처음 보았을 때 오규원 시인의 시 <한 잎의 여자>를 떠올렸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한 잎의 여자’ 첫째 연> 정말 한 잎 같다는 생각을 했다. 풀잎처럼 가늘고 여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고나자 반전이 일어났다. 박은희 님을 만나러 간 곳은 도봉산 입구에 있는 카페 ‘아르브르’였다.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공익활동가를 하면서 ‘카페 아르브르’ 사장도 합니다.” 공익활동가이면서 카페 사장.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일단 공익활동가 박은희 님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으로 정했다. 어떻게 공익 활동을 하시게 되었나요? “시작은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였어요. 아파트의 부조리한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그런 것들을 고치려는 노력을 시작으로 주부였던 제가 활동가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 안 도서관 운영체계도 바꾸어 보고, 이웃 간에 모임도 만들어 아파트 주변에 들어선 변전소 설치 반대 운동까지 하였습니다.” 아파트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해서 지역이라는 공동체로 나오셨군요.“‘도봉시민회’에서 인문학강좌 간사를 맡게 되면서 확실하게 지역 사회의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도봉시민회’는 저도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기존의 강좌를 새롭게 기획한 것입니다. 이론뿐 아니라 실천 과정도 커리큘럼에 넣었습니다. 지역인문학강좌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부합니다. 그 강좌는 ‘동북시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코로나 이전까지 매년 열리고 있었습니다. ‘도봉시민회’에서 일을 하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도시마을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도시마을연구소’는 어떤 단체이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도시마을연구소’는 ‘희망제작연구소’에서 강의를 들었던 이들과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열두 사람이 의기투합했어요. 지자체 어느 곳이든 원하면 마을 리더, 사회적 기업가 등의 양성 교육을 했습니다. ‘도시마을연구소’에서 배출한 공익활동가들이 사회적기업가, 협동조합 npo 활동가, 커뮤니티전문가, 찾동, 취업 마을센터 센터장 등 마을 곳곳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커뮤니티 플래너’라는 새로운 직업도 만들었습니다.” 주로 교육을 통해 공익활동가를 배출하는 일을 하셨군요. “네, 사회적경제전문가나 마을리더(공동주택단위)를 양성하는 공익활동가교육이 주력 사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국책 사업에 연구원으로 참여했고, 당시 11개 지자체에서 활성화되고 있던 마을공동체 사업 발제의 운영 기획자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포럼도 했습니다.” 활동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런 활동만으로도 바쁘셨을 터인데 어떻게 ‘카페 아르브르’ 사장님까지 하시게 되었습니까?“‘도시마을연구소’를 하면서 ‘카페 아르브르’도 함께 출발했습니다. 지역 활동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공익 활동을 계속하려면 경제적인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도시마을연구소의 모임 장소와 경제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카페를 차리게 한 것입니다. 카페 계약하고 바리스타 교육 받으러 갔습니다.” 카페도 공익활동가 일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군요. 카페 벽에 ‘나눔가게 씨감자’란 표지가 있는데 어떤 것인가요?“나눔가게 ‘씨감자’는 상인과 소비자는 이웃이라는 믿음을 가진 가게들이 함께 하는 운동입니다. 누군가가 차 한 잔 값을 미리 계산하고 메모를 남기면 다른 누군가가 미리 계산된 음료를 마시며 자유롭게 답장을 쓸 수 있어요.” 선뜻 다가오질 않는군요. 예를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ㅁ아저씨’라고 계셨어요. 소문에 의하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후 실어증에 걸리고 현실 감각도 사라졌다는 말이 있었어요. 저희 카페에 들어오시면 물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씀도 없으시고 눈도 마주치지도 않았어요. 물 한 잔을 드리면 그냥 말없이 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나눔가게 씨감자’ 운동 이후 ‘ㅁ아저씨’가 오셨을 때 누군가의 마음을 그분과 나누고 싶었어요. 그날도 물이라고 단 한마디만 하셨는데 혹시 커피로 드려도 될까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시럽도 드실래요라고 여쭈어 보았어요. 그때 눈도 안 마주치시던 분이 웃으시며 고맙습니다 하시는데 감동이 밀려오면서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어요. 나누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죠. ‘ㅁ아저씨’는 텔레비전 프로에도 나올 만큼 사는 모습이 독특했죠. 그 방송에서 동생을 찾았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 이후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잘 사시기를 항상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나눔가게 씨감자’의 의미가 감동과 함께 왔다. 실외에도 카페의 공간이 있군요.“평소에는 고객들이 커피를 마시는 장소지만 공연이 있는 날은 무대가 됩니다. 이곳에서 한 첫 공연이 ‘나눔가게 씨감자’를 알리고 후원하는 행사였어요. 연주자들이 독주 형태로 클래식 공연을 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신 한 분 한 분 연주자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때 모은 후원금으로 18살에 엄마, 아빠가 된 부부를 후원했어요.” 이곳에서 무대 행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보러 왔을 터인데.“홍보를 하지 않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홍보를 하지 않아도 공연을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길거리 공연이죠. 45년 역사를 가진 요들송 클럽도 와서 연주를 하는데 코로나로 요즘은 중단했습니다.” ‘카페 아르브르’의 쓰임새가 정말 많군요. 실내에서 하는 활동은 없나요? “시낭송회가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 편안하게 시를 낭송하고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은 모임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카페 아르브르’의 커피를 계속 마시게 되었다. 커피 맛이 내 기호에 맞았다. 아메리카노는 신선하고 고소했고 카페라테는 우유 특유의 비릿함이 없었다. 맛집 카페로 등극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이런 질문이 하고 싶습니다. 도봉은 박은희 님에게 어떤 맛의 커피인가요?“도봉은 처음에는 예멘 모카 맛이었습니다. 신맛이 강하고 쓴맛과 단맛이 섞인 그런 맛이었죠. 지금은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같습니다. 스모키한 맛도 있지만 구수해요.” 공익 활동은 사람과의 연대인데 감정적으로 다칠 때가 있을 듯합니다. 어떻게 해소하나요?“사람에게 다칠 때는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을 통해 힘을 얻곤 하죠. 그러나 때로는 정말 혼자인 듯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자연이 참 좋은 벗이 되어 줍니다. 집에서 카페로 올 때 횡단보도를 지나면서 도봉산과 마주합니다. 하얗고 단단한 화강암의 산봉우리들이 내게 잘 견디라고 말해주는 느낌입니다. 위로를 받는다고 할까요. 또 하나는 ‘창포원’을 걷는 일입니다. 한 바퀴 돌다보면 감정의 맺힌 부분들이 많이 풀립니다.” 창포원을 걷는 일은 나도 참 좋아한다고 했더니 비오는 날 저녁에 창포원을 꼭 걸어보라고 했다. 비에 젖은 불빛 속 창포원이 그렇게 멋있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소녀 같은 감성이 느껴졌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뒤늦게 여쭈어 보았다. 올해 60살이 된단다. ‘와 이건 배신입니다. 40대 정도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박은희 님이 웃으며 내게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했지만 내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겠어요.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소개해 주세요. 가능하면 공익 활동 아닌 것으로. “반려닭을 키우고 싶어요. 닭의 수명이 17살 정도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닭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참 짧게 살아요. 수많은 치킨 집을 지나다니면서 마당 넓은 집에 이사를 가 닭을 키우고 그 닭들이 천수를 누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닭이 막 낳은 달걀은 참 따뜻하겠죠. 그런 온기도 느끼고 싶고 새벽이면 꼬끼오 우는 닭 울음소리도 듣고 싶어요.”반려닭이란 말도 재미있었고 꼬끼오라는 의성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천수를 누리는 닭을 키우는 것이 꿈인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끝맺는 말은 다시 공익활동가 박은희였다.“지금 제 희망사항은 도봉산 상권 가게들의 활성화를 위해, 주민과 임대ㆍ임차인이 함께 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많이 위축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도봉산 가게들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등산객들이 등산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 들르고 싶은 가게가 많은 상권이 되었으면 합니다.”자리 욕심은 없다고 했다. 그냥 징검다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백신 2차 접종 이후 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한다고 했다. ▲ 도봉산에서 도봉로로 가는 길에 '벽화거리'가 있다.그 거리를 '도봉산 사랑의 거리'라고도 한다. 그곳에도 박은희 님의 기획과 노력이 들어가 있다.박은희, 그녀가 꾸는 꿈은 홀로가 아닌 함께 걸어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 사람의 한 발자국을 위해 사람과 함께 밀고 끌며 걸어가고 있다. 나무를 프랑스어로 아르브르(arbre)라고 한다. 카페 이름이 나무라는 뜻이었기 때문일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잎의 풀잎 같은 그녀가 나무처럼 느껴졌다. 한 잎의 여자 박은희,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이 개인적인 안위보다 다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숲을 만들기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우리 앞에 있다.▲ 카페와 박은희 님의 의상이 절묘하게 어울려 사진을 찍어 보았다.한 잎의 여자 박은희 님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서 있는 느낌이다. <이혜경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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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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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차 회사원의 슬기로운 직장생활
*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봉구 창동에 살고 있는 임용구라고 합니다. 나이는 29살이구요. 현재 DHL 코리아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도봉구 청년입니다!* 회사 자랑 좀 해주시겠어요?- 저희 회사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국제 물류 기업입니다. 아마 길가에서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글씨로 DHL이라고 적힌 트럭들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국가와 국가 간의 서류, 화물 등을 빠른 시간 안에 전달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외국계 기업이다 보니 기업 문화가 많이 개방적이고 사람들도 여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사내 문화를 가장 좋은 장점이라고 하고 싶네요! 아 그리고 일하면서 여러 나라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는 재미가 있고 일 외에도 각국 DHL 직원끼리 개최하는 아시안컵 축구 대회 등 대륙별로 진행되는 이벤트가 많아서 소소한 재미가 있습니다!* 지금의 직장에 다니기까지, 취업 성공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저는 대단히 운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면접에서 운이 좋지 않았나 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도 취업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외국 문화를 체험해보고 싶어서 덴마크로 교환 학생도 다녀 왔구요! 4학년 1학기부터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취업 성공 패키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취업 준비를 했었습니다. 프로그램 통해서 교육받는 것 외에도 외국계 회사를 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영어 준비도 열심히 했구요! 교환 학생 때 적극적으로 영어를 사용해서 실력을 향상시킨 게 실제 취업 준비 때 영어 면접에서도 면접관님들이 좋게 봐주신 계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현재, 고충이나 고민이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30살이 가까워지다 보니 저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꿈이 있어요! 하지만… 요즘 집값이 만만치 않더라구요…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살 나만의 집을 구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래도 내 집 마련을 위해서 정부 지원 정책이나 부동산 등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달라졌나요?- 회사에 입사한 지는 이제 만으로 3년이 다 되었네요. 처음에 입사했을 때는 모든 사람이 낯설고 업무들이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신입 사원일 때의 제가 쩔쩔맸을 업무를 어느새 뚝딱 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아 그래도 꽤 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직 모든 업무에 능숙해졌다는 건 아니에요! 그 날을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아, 참고로 저희 회사 사무실이 작년 초에 건물을 신축해서 이전을 했어요! 새로운 건물과 시설에 매우 신기해 하면서 출퇴근을 한 기억이 있는데 사실 옛날 건물과는 도보로 20초 정도 차이 나는 곳이랍니다. (웃음) 저희 회사가 공덕역에 있는데 출퇴근 시간은 편도 1시간 10분? 정도로 그렇게 많이 달라지진 않았더라구요. 그래도 내심 신축 건물로 이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집에서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었는데 조금 아쉬웠어요. (웃음)* 과거로 돌아가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언제예요?- 저는 학창 시절을 모두 도봉구에서만 보냈다 보니 사실 모든 추억이 도봉구와 관련되어 있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곳이기도 하구요. 여러 장소들을 다니면서 저만의 맛집도 많이 발굴해냈었죠!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친구들과 같이 학창 시절을 보냈던 중,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네요! 그 때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금처럼 심각하게 있지도 않았고 얼른 수업을 끝내고 어떻게 재밌게 놀까 하는 궁리하기 바빴거든요. 그리고 항상 주변에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한다던가 하는 등의 놀 수 있는 기회도 많았구요. 지금은 친구들 모두 사회인이다 보니 약속을 잡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 없는 환경이 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회사생활 잘하는 법)- 음 저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부터도 아직 스트레스를 계속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과 생활은 분리되어야 건강한 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도 되도록이면 그날 퇴근 후에는 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퇴근하고 운동을 한다든지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는다든지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져가지 말자! 가 제 노하우인 것 같습니다.* 회사를 가지 않는 날은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취미활동, 맛집 탐방 등)- 저는 회사를 가지 않는 날에는 주로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봅니다!요즘에 넷플릭스에 푹 빠져서 한번 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의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쉬는 날, 날 잡고 몰아보게 되더라구요! 요즘은 D.P를 너무 재밌게 봤는데 그 날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습니다. (웃음) 공부는 요즘에 회사와 연계된 사이버 대학교에서 영문학 수업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업무에서 계속 사용을 한다지만 이렇게 공부를 하면 감각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마지막으로는 운동을 할 땐, 저는 주로 중랑천으로 나가서 뛰어요. 예쁜 경치도 좋고 날씨도 요즘 선선해서 운동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한 번 뛰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에요! 대신 운동 같은 경우에는 쉬는 날에만 하는 것이 아닌 퇴근 후에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웃음)* 코로나 종식 이후, 제일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코로나 이전에는 취업 후 매년 해외여행을 한 번씩 다녀왔던 것 같아요! 그게 벌써 오래되었지만 아직 매년 한 번씩은 해외여행을 다녀오자는 다짐이 변하진 않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곳이 베트남이었는데 너무 재밌게 다녀온 것 같아서 동남아 쪽으로 다시 한번 꼭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취업이라는 도전에 한발 다가서는 청년들에게 자신만의 꿀TIP 부탁드립니다.- 음… 대단한 꿀팁이라 하기는 좀 그런데, 아마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시겠지만 크게 2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자기소개서를 미리 써놓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물론 기업마다 요구하는 자소서 문항과 형식 등이 다 다르지만 제 경험상 큰 틀을 벗어나진 않더라구요! 채용 마감에 맞춰서 급하게 쓰다 보면 평소 내 필력의 절반도 안 되게 작성될 경우도 많고 실수로 누락하는 내용도 많아서 미리 여유가 될 때 진지하게 생각하며 8문항? 정도 써놓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각 문항에 다른 에피소드들을 포함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은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리 써놓은 자기소개서를 이제 내가 원하는 기업의 자소서 형식에 맞춰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출한다면 좋은 자소서가 되지 않을까요?두 번째로 면접인데, 면접에서는 긴장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긴장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내가 여기서 떨어지면 다신 안 볼 사람들인 거잖아요! 제 경험상 면접관들도 자신감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니 면접 때는 자신있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올바르게 전달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너무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아무튼! 우리 도봉구 청년들! 모두 취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이태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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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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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이운희의 도봉구 적응기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름스웨터라는 인디밴드를 하고 있고, 문화기획자, 교육연극 강사로 활동을 하는 도봉구 예술인 이운희입니다. 제 MBTI는 INFJ에요. 원래 경상북도에서 살다가 20대 초반에 서울에 올라왔어요. 마포구, 강동구를 거쳐 도봉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도봉구가 제일 좋아요. - 서울에 올라오신 건 언제였나요? 서울 상경 스토리가 궁금해요. 제 고향은 경상북도에요. 대학교는 전라북도 완주에서 다녔어요. 졸업 후에 뮤지컬, 노래를 하고 싶어서 서울에 올라왔어요. 관악구 옥탑방, 마포구 반지하, 상수동, 강동구 길동에 2년씩 살았어요. 그러다가 도봉구에 오게 되었는데 여기는 예술인이 많은 거 같아요. 마포구에는 20대 초반 음악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도봉구는 예술을 좀 오래 하시고 다양한 예술인이 사는 거 같아요. 그리고 도봉구에서 지원을 많이 해줘요. 분야도 정말 다양해요. 작곡가, 한국무용, 사진, 기획자 등등 정말 많아요. 도봉구에 처음 왔을 때 한적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했어요. 이사 온 첫날에 도시가스 신청을 안 해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왔어요. 코로나 때문에 새벽에 동생이랑 배는 고프고 갈 곳은 없었어요. 그래서 24시간 감자탕집을 갔어요. 그런데 너무 친절하셨어요. 밥도 많이 주고 첫인상이 너무 좋았어요. 정감 있다. 따뜻하고, 소박하다. 그 전의 동네에서는 동네라는 느낌이 없었어요. 잠깐 거쳐 가는 곳이라는 느낌이었는데 도봉구는 우리 동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네 사람들이랑 친해져서 카페 사장님이랑 이야기 나누고 서비스도 주시고 친절해요. -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이신데 혹시 도봉구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장소가 있나요? 저는 작년 10월에 도봉구로 이사 왔어요. 그런데 도봉구가 예뻐서 자꾸 찍게 되는 것 같아요. 기본 카메라로 찍고 보정해요. 필름 카메라 느낌을 좋아하는데 유료 앱이에요. 등산을 좋아해서 북한산을 찍기도 해요. 그리고 집 앞에 우이천이 있는데 거기를 맨날 찍어요. 오리를 구경하거나 지나가는 학에게 소원 빌어요. (웃음) 우이천에서 걷고 러닝을 하는 것이 취미예요. 동네에 우이천 운동 커뮤니티가 있어요. 거기에 가입해서 처음 보는 사람이랑 바로 배드민턴을 쳤어요.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바로 배드민턴 치고, 헤어져요. 그 운동문화가 너무 웃겼어요.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배드민턴만 치는 문화가 신선했어요. - 최근 인스타를 통해 ‘안 하던 짓 실험실’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계신데 안 하던 짓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나요? 첫 번째로 브리타 정수기를 샀어요. 자취해서 페트병 너무 많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환경오염 주제로 수업을 하는데 아이들에게 ‘지구를 지키자’라고 말하기 전에 나부터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원룸에선 정수기는 사치 같아서 브리타 정수기를 쓰게 되었어요. 이렇게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되니까 시야가 넓어지더라고요. 요즘엔 텀블러, 분리수거에도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두 번째는 축구를 배웠습니다. 도봉구 쌍문동 야외축구장에서 배워요. 처음에는 룰도 모르고 잘 못 했어요. 원래는 운동을 안 좋아했는데 하기 시작하니까 재밌어지더라고요. 역시 몸은 움직여야 느는 거 같아요. 운동에 재미가 붙으니까 피티(Personal Training)도 하게 되었어요. 2번째 받았던 날 토를 했어요. 그 뒤로는 괜찮아져서 다행이었지만요. 그래도 피티를 하니까 식습관이 자리가 잡혔어요. 최근엔 ‘나이키런’ 앱을 이용해서 조깅을 하는데, 어플에서 응원의 말을 해주거든요. 그걸 듣다보니 벅차올라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 실용음악 보컬을 전공하셨다고 했는데 다양한 음악 장르 중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는 뮤지컬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뮤지컬 학원이 없고 보컬학원만 있었어요. 평소에 노래 잘한단 소리를 들어서 실용음악을 등록했어요. 선생님, 친구들이 좋아서 학원을 계속 다녔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실용음악과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놀랍게도 학교에서 배운 게 없습니다. 재밌게 놀았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 ‘여름스웨터’라는 인디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신데 팀 소개와 앨범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리 공연을 봤을 때, 냉탕이랑 온탕을 오고 가는 거 같다는 후기가 많았어요. 노래할 때는 잔잔한데 진행은 발랄해서 그렇게 느꼈나 봐요. 여름처럼 청량한 사람과 겨울처럼 따뜻한 사람이 만나서 여름 스웨터라는 뜻이에요. Blue Rose 앨범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우주에 관련된 지식을 담은 서적을 문학적으로 풀어냈어요. 이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난 건 진짜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우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의 시간은 찰나라는 뜻이에요. 파란 장미의 꽃말이 기적이란 뜻인데 당신을 만난 건 기적이라는 뜻을 담아냈어요. 1번 트랙부터 사랑에 빠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더 깊게 알아가고 헤어지는 스토리라인이 있어요. 사람들의 사랑하는 순간을 담고 싶었어요. 마지막 곡 가사 중에 ‘우리의 궤도는 너무 달라서 아마 다시 마주칠 수 없겠지만 한때 나란히 그렸던 그 궤적이 나의 지문, 나의 리듬’ 이란 가사가 제일 맘에 들어요. 헤어졌지만 그 기억이 남아있고, 그 세포가 남아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 교육연극 강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있나요? 어떤 교육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가르친다기보다는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생각으로 수업을 해요. 제가 어렸을 때 좀 불안한 환경에서 자라왔어요. 한창 놀 나이에도 그걸 만끽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노는 건 아이들의 특권이고, 그 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가수 윤딴딴의 ‘잘 살고 있지롱’을 알려준 적이 있었어요. 난 잘살고 있다고 놀리는 노래인데, 메롱을 하는 율동도 만들었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잘살고 있으면 그걸로 됐지 왜 놀려요?”라는 말을 했어요. 저는 그때 아이들이 굉장히 멋지게 느껴졌어요. 오히려 제가 수업을 하면서 더 배워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멋있어요. 지금에 충실하고 현재를 만끽하는 모습을 항상 배우고 있어요. 너무 웃긴 게 싸우고 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깔깔 웃어요. 저도 어릴 땐 그랬던 거 같아요. 그거를 까먹지 말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에 불안을 인지하는 능력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불안하면 거기에 잠식이 되었는데, 숨도 못 쉬겠고 울기만 했었어요. 요즘엔 아 불안하구나! 팔을 벌리고 야 불안아 와라! 하고 받아드리게 되었어요. 어차피 감정은 사라지거든요. 굳이 밀어내려 하지 않고 받아드리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졌어요. - 문화기획자로도 활동하고 계신 데 도봉구를 바탕으로 한 문화기획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도봉문화기획학교 수업을 듣고 있어요. 이별을 열심히 극복해온 경험치가 있어서 그걸 살려서 이별한 사람들에게 이별을 잘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기획을 했어요. 극복했던 꿀팁도 전해주고, 그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전에 했던 기획은 ‘One Self Tour’라는 저를 보려줄 수 있는 투어를 기획했었어요. 제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관악구 근처를 돌면서 장소에 담겨있는 추억들을 참여자들에게 소개해주었어요. 그리고 참여자들의 처음은 어땠는지 소개하며 감정을 나눴어요. 처음을 함께 한다는 게 재밌고 조금 더 특별하다고 느꼈어요. 저는 처음에 대해서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커요. 포기보다는 용기가 더 큰 스타일이에요. - 혹시 앞으로의 꿈과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올해의 목표는 제 개인 EP 앨범을 내는 거예요. 여러 가지 수단으로 저를 계속 표현하고 싶어요. 저는 제 성격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우연히 MBTI INFJ 성격유형의 특징을 봤는데 완전 제 성격이더라고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묘한 위로가 되더라고요. 나의 이야기를 하면 내가 위로받을 수 있구나! 또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나의 이야기를 하는 건 좋은 행위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글이나 몸짓, 음악, 수업 등 여러 가지 행위로 저를 표현하고 싶어요. 그래서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어요. (TMI) 아는 분이 훌라댄스를 하시는데 그분에게 훌라댄스를 배우고 싶어요. 오늘은 도봉구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이운희님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운희님이 도봉구에 적응하고 다양한 것을 배우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도봉구의 매력을 알려주셔서 좋았습니다. 저는 도봉구에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운희님을 통해서 도봉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운희님이 자신을 표현해가는 모습을 응원하고 기대하겠습니다.<이수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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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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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부잣집 그녀, 어릴 적 육상선수로 활약하다. - 차순자
딸 부잣집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작은 아씨들’ 만화영화를 추억해본다.왠지 한국판 작은 아씨들이 아니었을지…. 차순자, 그녀의 지난날을 들어보았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차순자. 그녀는 어릴 적 다들 힘들었던 시절, 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활약했다고 한다. 한참 선수가 귀하던 시절이라 선생님이나 학교에서 선수들 영입 시 많은 칭찬과 상품으로 회유했다. 운동이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고 운동연습 후 꼭 빵과 우유를 주었는데, 어릴 적 멋모를 때 그게 그렇게 맛있어서 그 맛에 운동했다며 웃으신다. 또 대회 우승 시 노트를 1년 사용할 양을 받았다고. 노트가 귀했던 시절에 노트를 부족함 없이 사용해 부러움도 샀다. 그런 상황에서도 부모님, 특히 어머님은 딸이 운동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녀에게서 운동을 끝까지 못 한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매들이 각자의 특기가 다른데 엄마의 욕심은 둘째 언니처럼 그녀도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자신의 넷째 딸이 운동선수로 입단을 고민할 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배구, 농구 중 선택하는데 조언을 해주었고, 열심히 운동하는 딸을 뒷바라지했다. 본인의 꿈을 딸이 대신 이루어준 것 같아 기뻤다. <손자와 손녀들을 둔 행복한 할머니>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어릴 적 아이들이 많이 아팠던 시간들이었다. 그때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건강하고, 네 딸 모두 결혼해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차순자 님은 자신을 ‘손자와 손녀들을 둔 행복한 할머니’라고 이야기 한다. 딸들과 함께 태국, 중국 등 해외여행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많이 다녔다고. 태국에서 사원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긴치마로 드러난 다리를 다 가려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그 앞에서 파는 커다란 천을 구입해서 치마처럼 두르곤 한다고. 그녀 가족은 이미 그런 내용들을 알고 한국에서부터 천을 준비해 가셨다며 웃으신다. 또 중국에서는 한국의 남산타워와 비슷하게 여겨지는 상하이 타워에 가기도 했다. 그 타워 꼭대기의 유리 바닥에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고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때의 사진들을 보여주신다. 이야기를 풀어갈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있다. 이렇게나 사진들이 많은데 사진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좋아하는 모든 것이 모여 있는 도봉구>그녀는 여전히 운동을 좋아한다. 아니, 그녀에게는 삶이 운동이다. 또 꽃을 좋아하고, 사람과의 만남도 좋아하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도봉구를 좋아한다고. 도봉구에서 17년을 살고 있는 그녀. 도봉구는 고향 같은 친근감이 있고, 사람들의 인심이 시골 같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웃들 중에서는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많다. 상추, 고추도 나눠 먹고, 또 시골에서 농작물이라도 올라오면 그것 역시도 나눠 먹고. 보통 ‘아파트’라고 하면 삭막하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운동하는 다른 여성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일상을 공유한다. 결혼한 자식들이나 시골 친척 집에서 먹으라고 보내주는 것들을 “너 이거 가져가서 먹어라” 하며 정겹게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기회가 많고, 그렇게 그 안에서 정을 나눈다고. “다른 지역보다 발전은 늦어져서 그렇지, 자연환경이 좋아. 공기가 다르다고. 여기 있다가 조금만 나가도 공기가 다르게 느껴져. 그것이 제일 좋고. 교통이 조금 불편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운동을 많이 하잖아. 우이천 걸어가지, 뒷산으로 가지, 마음만 먹으면 멀리까지 걸어서 갈 수 있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아주 멀리는 못가도 우이천, 뒷산, 덕성여대 후문 길까지 나 있는 길들이 너무 좋아. 5월이면 장미 넝쿨의 푸르름이 너무 좋고, 가을엔 단풍이 예뻐서 너무 좋고. 그래서 그런가? 도봉구 사람들은 마음도 풍요로워. 뭘 사주고 하는 걸 아까워하지 않아. 내가 사주면 저기서 다른 걸 또 사주고. 내 나이가 되면 다들 서로를 위하면서 안정되게 살게 되더라고. 그런 게 좋아. 여기 살기 때문에 다 비슷비슷해. 마음들이.” <그녀가 추천하는 도봉구 명소>“우이천이나 창포원(도봉산역 부근) 좋고. 도봉산은 말도 못 하게 좋고. 나이가 젊다면 도봉산에 올라가 볼 만하지. 힘들 것 같으면 계곡 따라만 가봐. 그럼 너무 좋아. 예전에 나는 항상 산에 오를 때는 정상까지 갔어. 지금은 나이가 들어 힘들지만, 요즘은 친구 만나면 뒷산이나 우이천에 자주 가. 백운대구, 은행나무 방학동 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야. 뒷산에 가면 방학동이거든. 방학동 건너 또 산이 있어. 그리로 넘어가면 연산군 묘가 있고. 그쪽에 은행나무 공원이 있어.” <코로나로 달라진 일상>그녀는 현재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운동 삼아 아파트 주변을 돌고 있다. 그녀의 현재 모습도 코로나 전과 후로 조금 달라졌다. 코로나 전에는 남편 출근 후 매일 오전 산책로를 1시간 걸었다. 그 후에 복지관에 가서 라인댄스, 요가 등을 배우고, 점심도 복지관 친구들과 먹으며 종일 함께 어울렸다. 저녁 식사 전에 돌아와 저녁은 남편과 함께하는 일상이었다. 매일 같은 일정이지만 하루하루가 재밌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그 좋아하는 운동이나 산책도 조심스러워 마음 내키면 한 번씩 가곤 한다고. 복지관에서 거리 두기를 하면서 운동 프로그램도 다시 열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호흡과 관련이 있으니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아직 수강 신청을 하지는 않았다. 원래 복지관에서 1년에 한 번씩 여행도 보내주었지만, 코로나 이후 2년 넘게 여행을 못 가고 있다. 더구나 운동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멈춘 상태라 참 답답하고 우울해지는 것 같다고. 운동이 생활인 그녀에게 코로나로 인해 일상의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 그녀는 운동을 하는 대신, 다른 것을 배우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월요일엔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화요일은 환경 살리는 교육과 함께 이것저것 공예 작품을 만들고, 금요일에는 휴대전화 사용법 강좌를 신청했다. 손녀가 가르쳐 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따라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달라진 그녀의 하루 일과>코로나월화수목금토, 일 전<-----------------복지관에서 온종일------------------->쉬고후캘리그라피환경교육 휴대전화 사용법쉬고산책로 1집쌍문(뒷산)근린공원연산군묘방학동은행나무정좌/호수 산책로 2집우이천로덕성여대후문 길쌍문근린공원 산책로 3집둘리 박물관쌍문근린공원솔밭발바닥공원 <끝없는 배움, 이번에는 사진!>그녀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휴대전화 사용법을 배워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자유롭게 올리는 것이다. 바닥 분수대에서 물줄기를 맞는 손녀를 찍은 사진은 물줄기가 물고기 형상으로 바뀌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 산책로를 찍은 사진들도 근사하다. 우연히 산책하다 꽃들이 예뻐서 찍은 사진들인데 너무 이쁘고 멋지게 잘 나왔다. 그녀는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한다. 사계절 내내 하루하루가 같은 일상 같지만, 그녀는 지나치는 꽃과 나무들이 매일 새로운 옷을 입듯 아름답게 바뀌는 모습을 포착하면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그녀는 오늘도 부엌 창에서 보이는 뒷산을 푸른 녹음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휴대전화 사용법을 배워 카메라에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어 삭제하는 일 없이, 개인 블로그나 카페를 만들어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사진을 보고, 친구·가족과도 공유할 그 날을 기대해 본다.<유명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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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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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도봉구 알리미, 주빛나
‘도.영.크’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의 줄임말이다. 도봉구에서 올해 2월 도봉구 공식 유튜버 10팀을 선정했다. 이들은 올해 12월까지 도봉구 공식 영상 홍보팀으로 활동하게 됐다. 오늘 만날 분은 도영크 1기에서 닉네임 ‘서울커뮤니케이터’로 활동 중인 주빛나 씨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을 만나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 일명 도영크 1기로 활동 중이신데 어떻게 지원하게 됐나요? 중학교 때부터 우리나라를 알려야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꿈이 너무 거창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내가 사는 도봉구부터 알려보자, 내가 사는 곳도 결국은 우리나라이니까요. 작은 것부터 시작하다 보면 내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대학교에 가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도봉구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거기가 어디냐? 서울이냐?”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20년 이상 도봉구에 살면서 자연도 예쁘고, 맛있는 곳도 많아 살기 좋았거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도봉구를 알리고 싶었어요. 때마침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면서 도봉구의 매력을 알릴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지원하게 됐어요. | 주로 도봉의 장소를 주제로 영상을 찍으시더라고요. 영상은 어떤 과정으로 제작되나요? 도영크 영상은 한 달에 1개씩 업로드하고 있어요. 그래서 매달 도봉구의 여행, 관광, 볼거리를 주제로 영상기획을 하고 있어요. 특히 제 일상을 생각하며 일상과 도봉구를 접목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잡으려고 했죠. 예를 들면 최근에 도봉구 힐링 여행코스 콘셉 영상을 업로드했어요. 코로나로 인해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든 상황이다 보니 도봉구에서 힐링하기 좋은 공간들을 소개하며 휴식을 취해보자는 기획 의도를 갖고 있었죠. 그래서 도봉구 내에 힐링 공간을 검색해 찾아보고, 직접 공간을 섭외해 혼자서 영상 촬영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영상편집과 썸네일 제작을 하고 완성되면 도영크 담당자님께 제출해 영상이 업로드됩니다. 초반에는 기획, 촬영, 편집, 썸네일 제작까지 일주일이 걸렸는데 요즘은 익숙해졌는지 4일이면 완성할 수 있게 됐어요. | 도영크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도봉구’라는 한정적인 지역 안에서 매달 다른 주제를 기획하는 게 어려웠어요. 처음엔 소개하고 싶던 장소들이었던 평화문화진지, 무중력지대 도봉을 소개하며 문제없이 영상을 제작했는데 점점 다른 도영크 크리에이터 분들과 장소가 겹치기 시작해 저만의 차별화된 콘텐츠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차별화 시킬까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제 일상과 도봉구 장소를 접목시키기’ 였습니다. 제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중력지대 도봉 소개 영상 다음으로 올린 영상이 제 일상과 도봉구를 접목시킨 영상이에요. 도봉구 맛집 소개 영상인데 조회 수가 높게 나왔더라고요. 제 일상과 지역을 접목시킨 판단이 맞다 라고 생각이 들었죠. 어려웠던 순간이었지만 잘 극복했던 거 같습니다. | 원래 영상 제작이나 크리에이터 쪽에도 관심이 많았나요? 계속 관심 있었어요. 제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세계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세계여행 관련 영상을 업로드했어요. 하지만 영상 제작 툴을 잘 다루지 못해서 꾸준히 업로드를 못 했어요. 너무 아쉬운 마음에 학원을 다니며 영상 제작 툴을 배우고, 올해부터 활동을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 크리에이터와 더불어 한국홍보에도 관심 있다고 들었어요. 과거 외국인 서울여행 가이드를 해준 적이 있다면서요? 캐나다 친구를 서울여행 가이드를 해준 적이 있어요. 캐나다 친구는 1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는 중에 만난 친구예요. 캐나다 친구와 계속 교류를 하다가 한국에 올 기회가 있어 2주 정도 같이 지내며 여행 가이드를 해줬어요. 캐나다 친구가 느낀 서울은 생각한 것보다 다채롭다고 말해주며 굉장히 좋아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 아직 도영크가 끝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뽑힐 도영크 2기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저는 지원동기로 20년 이상 거주한 도봉구 토박이로서 도봉구를 알리고 싶다는 것을 어필했어요.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를 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서 딱 1가지를 강력하게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상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더라도 도봉구를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지원을 할 수 있어요. 저도 지원하기 전에 영상 제작 실력에 걱정하며 고민했어요. 하지만 도영크로 활동하시면서 직접 공부하며 배울 수 있기에 걱정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도봉구 영상크리에이터로서 바라봤을 때 도봉은 어떤 지역구인 거 같나요? 저는 자연과 문화가 잘 어우러진 도시라고 생각해요. 도봉산과 북한산 국립공원을 구경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고 둘리 박물관이나 창포원, 평화문화진지가 가진 문화적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자연과 문화의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지역입니다. 도영크를 계기로 저도 이 아름다운 도봉구를 더 빛나게 하는 주민이 되고 싶은 바람이 생겼어요. <남동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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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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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틈에서 시 어떠세요 - 이소연 시인
바람이 차가워지고 하늘에는 끝도 없는 파란색이 가득하다. 나뭇잎의 초록색은 점점 빨간색으로 물들고 있다. 나무가 잎을 다 털어내기 전, 이 모습을 다른 사람과 같이 보고 싶어졌다. “소연시인님 보고싶어요!”“나두 하느리 복후싶 (방긋)” 소연시인님은 낯선 지역에 홀로 살기 시작한 나에게 소중한 친구이다. 바쁜 활동을 하고 계신 시인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노원구에 위치한 서점 ‘책인감’으로 갔다. Q.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신다면? ▲ 시인 이소연 “저는 도봉구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이소연이에요.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를 2020년도에 발간했습니다. 최근에는 ‘고라니라니’라는 생태일기를 썼어요.” 시인님은 작년에 발간한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를 통해 알라딘 독자선정 2020 한국 문학의 얼굴로 선정되었다. Q.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서점 책인감에서 파견작가로 일하며, 문화를 나눌 수 있는 이벤트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어요. 서점을 책을 사는 공간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시인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작가회의는 작은 서점과 지역 내 문학작가를 매칭하는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 서점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 소비와 작은 서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다. 매칭된 문학작가는 각각 '상주작가', '파견작가'로서 문학코디네이터 활동을 한다. 소연시인님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올해는 ‘책인감’에서, 작년에는 ‘도도봉봉’에서 파견작가로 활동했다. 농부와 시인의 생태일기 ‘고라니라니’ 시인님은 최근 신작 ‘고라니라니’를 출간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제작된 이 책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농부친구와 시인친구의 이야기다. 책에는 시인님과 농부님이 주고받은 사진과 말들이 있다. 그 중에는 서로의 생각의 차이로 인한 다툼도 볼 수 있었다. “나이 차이도 있고 사는 곳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달라요. 처음 만났을 때는 하는 말들이 좀 많이 거슬렸어요. 근데 두 사람의 공통점인 자연, 생명에 대한 남다른 경외심을 농부가 저한테 선사하니까 갈등을 넘어선 정이 싹텄어요. 책 속에 ‘정말 신뢰하는 친구와 다툴 때, 좋은 싸움을 할 때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싸운다.’라는 말이 있어요. 애정이 없으면 싸움 중간에 그만하고 싶고 말하기 싫어져요. 포기하면 갈등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말 애정이 있는 사람과 의견이 달라 싸울 때는, 최선을 다해 싸우고 포기하지 않아야 해요. 또한 최선을 다해 설득할 마음과 설득 당할 마음을 동시에 가져야 돼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우정을 쌓으면 이념이나 가치관을 뛰어넘어 그 사람의 입장이 되기 때문이죠.” 시인님은 “서로에게 배우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농부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도봉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농부친구는 도봉구를 서울의 중심으로 알아요. 내가 도봉구에서 모든 걸 다 하니까.” 라고 말했다. 도봉구, 나의 ‘로컬’ 포항 출신인 소연시인님은 이병일 시인님과 결혼을 하며 도봉구에 자리를 잡았다. 도봉구에 사는 동안 등단을 했고, 시간도 많이 흘렀다. 지금의 시인님께 도봉구는 어떤 곳인지 여쭤봤다. “세상의 중심이죠. (웃음) 여기는 왜 이런 게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저는 그 '이런 게'를 해버리는 편이에요. 어떤 걸 바꿔주기만을 희망하기보다, 내가 바꾸고 내가 활동해요. 그러다보면 내가 있는 공간이 핵심적으로 변하거든요. 중심을 내가 있는 공간으로 옮겨오는 거죠. 현 시대는 각자의 ‘로컬’, 지역성을 개성으로 발현하는 게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표본적인 중심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의 고유한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지역에도 좋고, 예술인에게도 좋은 기반이 된다고 생각해요.” 결혼 생활을 시작한 도봉구는 시인님의 아들인 서진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인 서진이에게도 도봉이 잘 맞는지 여쭤봤다. “아주 좋아요. 학벌 때문에, ‘표준’이란 것 때문에 다들 대치동 등등 교육 특구로 간다고들 하지만 저는 ‘표준’을 소박하게 생각해요. 서진이가 밝고 맑게 잘 크면 그게 제일 좋아요.” 도봉 청년펠로우쉽과 동네서점 파견작가 시인님이 생각하는 도봉의 인물을 물어봤다. “일단 저의 남편, 도봉구 대표 시인이죠. ‘정의공주’ 웹툰을 연재하는 ‘출판사 마저’ 오현지 대표도 있어요. 도봉구에 예술인이 진짜 많아요. 양말공장 프로젝트를 협업한, 도봉 펠로우쉽을 같이 한 분도 있고... 아, 작사가도 있어요!” 도봉 펠로우쉽이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쓰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현재 시인님도 펠로우로 활동 중이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도봉의 예술인들이 연결되어있다. “이런 인터뷰가 공개 되면 더 많은 예술인들이 연결되어 네트워크 인프라가 잘 구축될 것 같아요.” 라고 시인님은 기대감을 전하기도 했다. 시인님의 인스타그램(@youngsosoun)에는 매일 다른 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문학 활동 게시물이 업로드된다. 어제는 김은지 시인님과 하는 ‘시인 문학 토크’, 오늘은 ‘여귀저귀 낭독회’ 등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시를 못 써요. (웃음) 진짜 바쁜데, 저는 골방에서 고뇌하며 고품격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활동에서 의미를 찾는단 말이에요. 시가 텍스트로 있을 때보다 이 시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을 만날 때 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활동에서 시를 쓰는 의미를 더 찾아요. (시를 쓰는 것 외에) 활동을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하지만 들어오면 받는 스타일이에요. 이제는 시 쓰기와 같이 간다고 볼 수 있죠.” Q. 시인으로서 도봉구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공무원분들이 시를 읽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문학 활동을 기획하고 계신데 계획 전에 시집을 먼저 읽으시면 더 좋은 계획 나오지 않을까요? 시의 언어는 세상을 달리 보게 하고 새로운 언어적 충격을 준단 말이에요. 이런 충격들로 세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이죠!” 시인님은 “도봉구청장님도 시의 세계에 들어오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덧붙였다. 도봉구의 예술정책과 프로그램은 만족스럽지만,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밝혔다. 또 문학 강의에 대한 강한 의지도 보여 주었다. 계절에 틈에서 보고 싶던 시인님을 만나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예술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풍족하게 한다. 그런 예술을 하는 모든 분야의 예술인들과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하루였다.<김하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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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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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 미래를 만나다
“대학에서의 공부가 비록 쉽지는 않았지만 열정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코로나가 계속되어 구민들의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시대. 앞으로 대한민국의 의료업계를 이끌어나갈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최진태. 올해 갓 성인이 되어 간호사의 꿈을 꾸는 청년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도 입시에 매진했던 그는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오늘은 그가 걸어온 길을 알아보자. 현재 그는 경민대학교의 간호지망생이다. Q 간호사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어렸을 적 중이염에 걸렸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알던 간호사분이 직접 수액을 놔주시고 치료해 주셨던 적이 있었죠. 당시에는 아프기만 한 기억이었지만 기억은 곧 동경이 되어 간호지망생까지 되었네요. Q 간호지망생은 주로 무엇을 배우나요? A 우선 여러 병명과 기관을 영어로 적힌 의학용어를 배우고 동시에 필수로 응시해야하는 토익시험에 대비하여 영어를 배웁니다. 그리고 생물학, 심리학, 해부학, 기본간호학 등 여러 과목을 차근차근 배워나가게 됩니다. Q 현재 간호지망생은 실습을 진행 하나요? A 네. 1학년 2학기 되면서 실습이 시작됩니다. 특히 간호학과는 아무래도 실습이 중요하다니 다른 학과와 달리 이러한 시국에도 오프라인 수업이 많은 것이 특징이네요. 경민대학교의 표어를 나타내고 있다. Q 간호사를 꿈꾸며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 있었나요? A 공부였습니다. 간호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공부도 어려웠지만 입학하고 난후의 공부도 항상 어려웠어요. 특히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했던 생물이나 화학이 중요해지더군요.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것이 꽤나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Q 코로나 이후 특별히 바뀐 점이 있나요? A 아무래도 실습 이외의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바뀐 점이네요. 사실 저는 코로나 이전에는 대학생활을 해보지 않았기에 잘 모르지만 온라인 수업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은 아무래도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Q 현 코로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의료진도, 병상도 부족한 이 사태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전 국민이 모두 백신접종을 받고 방역수칙을 지켜 확진자가 0명이 되는 날까지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야한다 생각합니다. Q 미래에는 어떤 병원에 근무하고 싶으신가요? A 병원을 딱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근무하고 싶은 과는 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하고 여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응급실에 근무하고 싶습니다. Q 현재 지역 내에서 자주 이용하는 시설은 무엇이 있으신가요? A 자주 이용하는 시설은 헬스장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강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호학과에서도 체력을 강조하더라구요. 생각보다 더 간호사가 체력이 중요한 직업이기에 계속 체력을 기를 생각입니다. 저 외에 앞으로도 간호사를 꿈꾸는 후배들이 있다면 간호사가 되기 이해 체력을 기르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Q 코로나를 직접 겪었던 고3이신데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A 마스크를 쓰는게 힘들다. 숨쉬기 답답하다. 여러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 나태였습니다. 사람이 직접 움직여서 수업을 듣지 않으니 필연적으로 나태해진 것 같았습니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저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외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의료인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정세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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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주민의 삶을 돌아보다 (3) - '백운시장, 삶의 터전이 되다' (최복순님의 삶)
잠시 짬을 내어 말로만 듣던 ‘백운시장’에 가보게 됐다.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나 우이동성당 앞에서 내렸다. 커다란 간판의 정육 식당과 부동산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니 전봇대 전선 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북한산 자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재래시장하면 으레 떠오르는 높다란 아케이드도 없는 오랜 시간 묵묵히 흘러온 골목 시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백운시장' 진입로 시장의 처음과 끝은 생각만큼 짧지 않아서 한참을 걸어야 했다. 버스 정류장 앞 골목 안쪽에 있는 유림마트에서부터 시작해서 백운교 다리 너머 우동집까지 계속 걸어야 했다. 가던 길 한복판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작은 간판 하나가 보였다. ‘쌍둥이 닭집’ 간판이 낯설게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개를 돌려 애써 찾아보아야만 보이는 평범한 집인데 신기하게도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쌍둥이 닭집'과 '쌍둥이 건어물'가게 앞 아담한 키의 주인아주머니(최복순.70세)가 반갑게 맞이하는 ‘쌍둥이 닭집’은 본래 수선 집을 하던 곳이었다. 수선집의 변신이 궁금하기도 했고 명절 준비 음식도 구경할 겸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스무살의 복순씨는 푸른 청춘의 꿈을 안고 경북 봉화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녀는 당시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라사라 양장학원을 다녔다. 이곳 쌍문동까지 와서 장사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녀 시절 화곡동에서 1년 정도 친구와 자취를 하다 보니 어느새 사글세 비용까지 싹 날려버렸다. 지인에게 내 딸 좀 살려달라는 친정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 골목 오막살이에서 간신히 집터를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가지고 있는 손재간이 있어 바로 수선 집을 차릴 수가 있었다. 스무살에 서울로 올라온 후 최복순씨 70년대 말에만 해도 주위에는 온통 오막살이처럼 작은 방을 끼고 있는 허름한 집들이나 판자집이 많았다. 시골에서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고향인 봉화보다 여기가 더 시골다운 동네였다. 변변한 집이라곤 없었고 소나무가 많이 있던 변두리 동네였다. 오막살이 집 몇 채와 철물점이 하나 있었고 제일문구점 뒤 청한빌라 쪽에는 무성한 밤나무 숲이, 덕성여대 자리에는 너른 밭과 솔밭이 많았다. 당시 쌍둥이네 닭집 앞길은 지금보다 더 낮았고 도로 포장도 안 되어 있었다. 80년대 백운시장 주변 (출처 : 네이버) 우이천은 비만 오면 범람이 심해서 살기에 너무 힘들었다. “귀한분만 오시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천에는 범람이 잦았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하천 물이 맑고 얕아 목욕을 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는 고기도 구워먹고 아이들은 가재를 잡고 놀았다. 하천 주변에는 돌들을 겹겹이 놓아 징검다리 형식으로 하천으로 들어갔는데 잦은 범람으로 인해 양쪽에 축대를 쌓게 되고 작은 다리들도 세 차례나 교체되어 지금의 백운교가 되었다. 백운교(청한빌라쪽)에서 바라본 우이천과 도봉산 다리건너 제일 문구점 뒤에는 이름 없는 시장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동화운수 자리에 시장이 있었는데 골목시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남은 집 양쪽에 함석이 아닌 천막 가건물로 가게들을 만들어 양쪽 길가에서 쭉 장사들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닐 정도의 길이 나 있었고 쌀가게 옷가게 옆에는 신일빌라도 생기게 됐다. 당시에는 주인들이 세를 줘 상인들이 임대한 자리를 잡고 장사를 했었다. 연립주택이 들어서면서 가건물들은 자리를 내줘야 했다. 자리를 내 준 상인들은 차츰차츰 백운시장 골목으로 하나 둘씩 들어오게 됐다. 백운시장의 시작이 된 셈이다. 백운시장에서 2년을 열심히 일한 복순씨는 수선집에서 쌍방울표 메리야스를 파는 속옷가게까지 판매 종류를 늘리게 되었다. 결혼을 한 후 일이년이 지나서 운 좋게도 맞은편에 있던 통닭집이 사정이 생겨 나가게 되자 그 집을 넘겨받게 됐다. 그 덕에 통닭집까지 장사를 겸하게 됐다.인터뷰 하는 최복순씨 동네 약국을 하시던 아저씨가 사이를 놓아줘 호프집을 하던 친구에게 닭 튀기는 방법도 전수 받게 됐다. 쌍둥이를 낳게 되어 가게 간판도 ‘쌍둥이 닭집’으로 버젓하게 짓게 됐다. 복순씨의 빠른 눈썰미까지 더해 드디어 통닭다운 판매용 통닭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턱없이 일손이 부족해지게 됐다. 멀쩡한 회사원이던 남편도 직장을 그만두고 닭집 일을 하게 됐다. 당시 복순씨 남편은 음식장사가 처음이라 서툰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배달 일을 하면 퇴짜를 맞거나 손님들의 트집을 다 들어주어야 해서 늘 녹초가 되곤 했다. 생전 만져본 적도 없는 생닭을 칼로 다루고 다시 기름에 튀기고 뒤처리를 하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생닭 냄새가 늘 넘어 왔다. 그럴 때마다 쌍둥이 갓난아이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또 열심히 일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추석하고 설날 딱 두 번만 쉬고 매일 일을 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안 먹고 안 놀고 일만 했다. 복순씨는 지금에 와서야 애들하고 한번 놀러도 못간 것이 한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덕분에 갈수록 장사는 잘 되었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몸이 아프셔서 일을 그만두시고 나서 이 집도 복순씨에게 팔게 됐다. 이제는 손이 많이 가는 수선집 대신 닭과 통닭집, 건어물과 생선가게로 업종을 변경하기도 하고 품종도 점차 늘려가게 됐다. 생선가게는 처녀시절부터 이용하던 건너편 생선가게 집 아주머니가 주변에 공터가 많으니 한번 해보겠냐고 추천을 해줬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들을 주변 아주머니 덕분에 꼼꼼히 배울 수 있었다. 생선을 떼어오는 방법이나 싱싱한 생선 고르는 법, 생선 처리하는 법 등을 상세하게 전수받아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하지만 생선도 여름에는 생선냄새와 날 파리와 씨름하고 겨울에는 차디찬 어육과 찬물을 만져야 해서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닭집과 함께 운영하면서 악착같이 일을 했다. 점점 커가는 큰아이와 쌍둥이 자매까지 키우느라 늘 일손은 부족했고 아이들이 먹을 것들도 부족했다. 그럴 때마다 동네 분들이 손을 걷어 부치고 자신의 일처럼 복순씨의 일과 그녀의 아이들을 돌봐줬다. 아이용품도 때때마다 한 박스씩 보내줬다. 복순씨는 이웃 분들 덕분에 아이들을 모두 키울 수 있었다. 복순씨의 남편은 아홉째 중 둘째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부모님을 모실 형편이 안 되어 복순씨가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근방에 계시던 친정 부모님까지 한분은 암에 걸리셔서 돌봐야했고 또 맏딸노릇까지 겸해야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연로하신 아버님을 5년 동안 모셨다. 가게와 집을 왔다 갔다 하며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 바쁜 와중에서도 지역에 있는 노인정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공급해 주는 봉사도 했다. 주위 분들이 하도 고생한다고 추천하여 쌍문1동에서 주는 공로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마운 일이었다. 복순씨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고비 고비마다 주변 이웃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고난을 헤쳐 나갔다. 아이들도 착하게 잘 자라줘 2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자녀들에게 집과 가게를 물려줄 만큼 여유도 생겼다고 한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자니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낮에 손님들이 많이 와서 기다린 시간이 조금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며 가는 길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도 아주머니는 피곤함도 잊은 채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도마 위의 생닭과 날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 본인의 꿈 대신 가족들의 꿈을 이뤄온 세월이었지만 굵어진 손마디에선 아주머니의 인생 보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쌍문동에서 40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한 이웃이 있었고,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일터와 가족이 있었다. 아주머니의 꿈도 같이 성장한 백운시장에 그녀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다.'백운시장'이 종료되는 길목 <정지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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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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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모 김진원 님을 응원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위탁모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위탁모가 뭐야?”라는 낮은 수군거림이 들렸다.“입양가기 전의 아이들을 위탁해서 키우는 일을 합니다.” 2년 전 동네 모임에서 기억이다. 위탁모라는 분들을 TV에서는 봤지만 바로 이웃에서 보니 낯설면서 신기했다.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봉구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은 사람으로 그녀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전화를 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인 그녀는 “좋아요.”라고 즉시 답을 해주었다. 위탁모 그녀 이름은 김진원이다. 나이는 60대인데 그 연배에 흔치 않은 키로 168센티이다. 젊은 날은 몸무게가 49킬로여서 하늘하늘 코스모스였다고 한다. 지금은 살이 많이 쪄 코스모스 이미지가 다 없어졌단다. 내가 코스모스에서 장군님으로 변했다고 했더니 큰소리로 웃었다. 위탁모는 힘이 세어야 한다며 지금이 좋다고 했다.▲ 김진원 님. 커피를 앞에 두고 잠시 상념에 잠기시는 모습 도봉에 산 지는 28년이 되었고 위탁모를 하게 된 것은 10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위탁모를 하게 된 계기를 여쭈어 보았다. “처음부터 위탁모를 한 것은 아니었어요.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정말 우연히 맡게 되었어요. 보람(가명)이라 불리던 그 아이를 8개월 동안 돌봐 주었어요. 보람이네가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죠. 마음이 많이 허했어요. 그때 위탁모 이야기를 듣게 되어 무작정 합정동에 있는 ‘홀트아동복지회’로 찾아갔어요. 그렇게 시작한 위탁모가 벌써 10년입니다.” 위탁모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있나요? “위탁모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 제한도 있어요. 제가 할 때는 55세까지였는데 지금은 좀 더 늘었다고 하더군요. 위탁 가정의 수입도 봅니다.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가정을 선정합니다. 위탁아를 생계 수단으로 생각하면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겠죠. 아기를 양육한 경험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해요. 정신과 진료를 받은 병력이 없어야 합니다.” 가정 방문까지 온다고 한다. 자격이 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교육도 몇 시간을 받아야 비로소 위탁모가 될 수 있단다. 결코 녹녹하지 않은 조건이다. 어떤 아이들이 위탁아로 오나요? 키우는 기간은요?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오죠. 때로는 입양이 결정된 아이들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키운 아이들은 다 입양이 되었어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2년 이상 키운 아이도 있어요.” 그 동안 키운 아이는 몇 명이었나요? 어느 나라로 주로 입양이 되나요? “그 동안 20여 명의 아이를 키웠어요. 국내 입양은 2명 정도였고. 노르웨이도 2명 갔는데 대부분은 미국입니다. 지금 키우는 가원(가명)이도 미국으로 입양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와 있는 동안에는 가원이를 누가 돌보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남편이 돌보고 있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말씀했다. “위탁모만큼 위탁부가 중요합니다. 저는 남편이 정말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처음 시작은 제가 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저만큼이나 아이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와서 인터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남편의 덕입니다.” 위탁부라는 명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 휴대폰으로 남편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 왔다며 보여주었다. “남편이 자기 말 하는 줄 아는 모양이네요. 가원이가 노는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었어요” 보여주는 동영상에는 가원이가 그네를 타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가원이 표정이 그야말로 햇살같이 환했다. 영상을 보는 중에도 가원이가 정말 똑똑하다며 연신 자랑을 한다. 김진원 님은 이야기 도중 수첩에 무언가를 적곤 했다. 오늘 나와 만났다는 사실도 적었다. 수첩에는 영어 문장도 빼곡하게 적혀 있다. 위탁모가 되면서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위탁아 양육 일기도 쓰는데 입양하는 부모에게 아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주고 싶어서란다. ▲ 수첩 빼곡하게 영어문장이 있다. 키우면서 뭐가 제일 힘드신가요? “다칠까 늘 걱정이죠. 몸뿐 아니라 마음도 다칠까 걱정입니다. 정서가 불안한 아이인 경우 놀이치료 등을 하면서 계속 치료를 하러 다니는 경우도 있어요. 혹시 내가 키우는 아이도 그렇게 마음을 다칠까 신경을 많이 쓰게 됩니다. 아이가 어려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속상해요.” 위탁모로 어느새 10년을 일하다 보니, 그 사실을 아는 분들은 아이가 무신경한 말에 상처입지 않도록 잘 대해 주신다고 덧붙였다. 그 마음과 배려가 정말 고맙다고 했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올랐다. 이렇게 키운 아이와 헤어질 때 정말 서운하시겠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생살이 떼어나가는 것같이 마음이 아프죠. 그래도 처음보다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많이 짧아졌어요. 입양되는 날짜가 다가오면 제 마음도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아이도 아픈 경우가 많아요. 유난히 칭얼대고 그래요.” 위탁아들이 외국에 입양될 때는 누가 데리고 가나요? “예전에는 에스코트맘이라고 있었어요. 외국 가는 비행기 표 값을 절약하기 위해 자원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양부모에게 넘겨주었어요. 요즘은 입양할 부모가 직접 와서 아이를 미리 몇 번 만나고 나서 데리고 갑니다. 입양하기 전에 그렇게 양부모와 교감할 시간이 있는 게 정말 다행이죠.” 이야기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았다. 도봉은 김진원 님에게 어떤 곳인가요? “28년을 살았어요. 시골스럽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운 곳이라는 생각을 해요. 아파트 주민이나 주변 동네 사람들과도 이제 가족 같은 느낌입니다. 제2의 고향이 되었어요.” 도봉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요? “창동플랫폼61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곳에 음악 공연이 많았어요. 그런 공연을 보는 것을 즐겼어요. 요즘 공연을 못 보니 너무 아쉬워요” ▲ 창동플랫폼61 위탁모 가원 엄마가 아니라 또 다른 꿈을 가진 김진원 님이 있나요? “제가 젊은 날 성우 시험을 봐 1차에 합격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반대로 2차 시험을 못 봤어요.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했죠. 아이 키우고 남편의 사업을 도우고 하느라 그만 두었지만 지금도 무대에 올라 연극을 해 보고 싶어요.” 키도 크고 표정도 풍부하고 목소리도 힘이 있어 무대를 꽉 채우고 압도할 것 같다. 어떤 연극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박정자 배우처럼 1인극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진원 님이 창동플랫폼61을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꼽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현실에서는 위탁모 가원이 엄마로 살지만 마음에는 배우 박정자가 숨 쉬고 있으니, 창동플랫폼61에 가면 그녀 마음속 공연 본능으로 심장의 박동 수가 빨라질 것이다.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위탁모와 연극배우 중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여쭈어 보았다. “다음 생에는 위탁모라는 직업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위탁모의 세계에서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구해진 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아이를 낳은 부모가 그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이겠죠. 제가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위탁아들의 마음에는 알게 모르게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키우면서도 마음이 늘 애잔합니다.” 우문현답이었다. 가원이가 엄마를 찾는다며 집으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문을 열면 가원이가 엄마라고 말하며 뛰어올 것이다. “어이구, 우리 가원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라며 아이를 안아줄 것이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책을 읽어주고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자장가를 부를 것이다. 아이가 자면 돋보기를 끼고 공책을 펼쳐 양육 일기를 쓸 것이다. 입양한 후에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하면서. 인생의 무대에서 위탁모라는 배역에 연기가 아닌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원 엄마 김진원 님을 응원한다. <이혜경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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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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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다. 도봉구 청년, 그리고 도전.
. 본인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곧 서른을 바라보는 도봉구 창4동 주민 임준혁입니다. 현재 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도봉구에서 몇 년을 거주하셨나요? - 6살 즈음에 경기도 의정부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거의 25년쯤 됐네요. 거주한 아파트는 몇 번 바뀌었지만, 결국 이 지역에서 모든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사실상 고향이라고 할 법하죠. . 역사를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봉구의 역사도 혹시 아시나요? - 도봉구에 속해있는 각 행정동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습니다. 방학동은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산 중턱에서 쉬고 있는데, 학(鶴)이 날아다니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쌍문동은 옛날 이 지역에 살던 한 효자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상 중에 슬픔으로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효자문을 두 개 세웠다고 하여 쌍문(雙門)이라고 합니다. 창동은 매우 단순하게도 조선시대에 양곡창고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하여 창(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앞에 두 이름에 비하면 정말 짧은 유래죠. . 나중에도 전공을 살려 일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순수하게 역사학이라는 학문으로 일을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문 연구 같은 일은 적성에 안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처음 역사학에 입문했을 때부터도 이 지식이 정말 나의 길일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졸업까지 하고 나니 구체적인 지식은 쉽게 잊어도 역사학만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체득하여 지금의 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학을 전공하며 과거의 일을 통해 현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고, 이러한 사고력은 앞으로 제가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다른 사람이 발휘하기 힘든 저만의 역량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도봉구에 거주하시면서 추억의 장소가 있으실까요? - 도봉구의 지리적 특징은 서울에 걸맞은 도시 인프라와, 그에 대비되는 자연환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봉구청과 대형마트 등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천을 끼고 있는 시골풍의 무수골 마을이 있습니다. 제 가족은 이곳에서 1년 넘게 주말농장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자주 오지는 못하더라도 정성 들여 키운 상추며 각종 채소를 따다가, 바로 옆에 있는 평상에서 고기를 구워가며 식사를 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그곳은, 도시에 있으면서도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요즘엔 이런 곳이 너무 좋더라구요. . 퇴근 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인가요? - 저는 맥주 마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나 창동역2번 출구에 있는 찰리네 맥주집이 있는데 세계맥주집이거든요. 저는 거기 단골이에요. 가면 다양한 맥주들을 즐길 수 있으며 사장님께서 너무 친절하세요. 가끔씩 맥주도 추천해 주시고 아무래도 저도 역사학과를 전공하다 이게 전공병 인지는 몰라도 사장님께서 새로운 맥주를 추천해 주시고 그 맥주에 대한 유래, 이야기를 해주실 때 마다 너무 즐겁고 머릿속에 담아두고 나중에 친구들이랑 한잔 할 때 저도 자연스레 써먹게 되더라구요. 뭔가 술을 마시면서도 그냥 마시는게 아니라 술이 담은 이야기 또한 맛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그 맛에 가는 것 같아요. 이야기 하다보니 지금도 생각이 나네요. . 이외에도 다른 취미 활동은 없으신가요? - 제가 학창시절부터 야구랑 볼링을 주로 했었는데요, 코로나19 이전에는 주로 가는 루트가 항상 똑같았어요. 스크린 야구장 아니면 볼링장 후에 맥주집이에요.(웃음) 저는 사실 야구를 굉장히 좋아해서 지금은 닫혔지만, 주말에는 구리에 있는 야구장에서 기록원 일을 했었어요. 그때 참 좋았는데 코로나라 지금 야구장을 못쓰는게 아쉽습니다. 대신 볼링을 많이 쳐요. 창5동 쪽에 한영, 미화 볼링장을 주로 이용하는데 너무 많이 치면 손가락이 아픈데도 회전을 이용해 핀을 쓰러트리는 맛이 진짜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요.(웃음) 그런 맛에 하는 것 같습니다. . 회사에서의 계약기간이 끝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십니까? - 저는 딱히 계획을 세우진 않아요. 다만, 내년 2월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다음 취업을 위해서 학원을 좀 다녀보려고 합니다. 지금 CS공부를 따로 하고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혼자 하다 보니 제가 배울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느끼게 되어서 퇴사 후에는 좀더 밀도있는 지식을 쌓고 다음에 취업하는 회사에 들어가 바로 들어가 일을 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고 싶어요. . 요즘 들어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 취업을 제외하고 요즘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는 건, 사람의 성격 분석입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MBTI는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특성을 요소마다 분류하여 개별적인 성격 유형이 만들어지고, 유형 간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이 저에겐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이 넓은 세상과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도 결국 어느 한 종류의 사람이고,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사람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어,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과 자존감이 자라남을 느낍니다. . 코로나 종식 이후 제일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마스크를 벗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싫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해외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마스크 때문에 답답하게 있었던 과거를 날려버릴 수 있는 시원한 곳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일본 홋카이도 쪽으로 여행을 갔었을 때, 여름철임에도 위도가 높은 곳이라서 정말 산뜻한 바람이 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다시 한번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고 싶습니다. . 국내에서는 그런 곳이 없을까요? - 국내에서는 담양 대나무 숲을 너무 가고싶어요. 거기는 사진으로만 봤는데요. 저도 점점 연륜이 생긴다고 느끼는게 아니면 이게 회사에 갇혀있다 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건지 울창한 숲과 한적한 바람, 마치 검을 든 무사들이 당장에라도 칼 들고 나타날 것 같은 그런 대나무 숲을 봤는데 너무 좋은거에요. 아마 해외여행 보다는 당장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저는 담양 대나무 숲을 가려구요. 아참! 도봉구에는 북한산 둘레길이 있는데요 거기도 좋아요! 주말에 혼자 머리 식히기 진짜 좋습니다. . 취업을 준비하시는 청년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일단 저부터도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 동지들에게 해야 할 말이겠네요. 단순히 코로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청년 세대는 사회 여러 방면으로 참 힘들고 고된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회적 지표를 보면, 우리는 절대 우리 부모님 세대만큼의 노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사는 게 아니죠. 하지만 인간 역사에서 과거의 방식을 이어가기만 하여 미래에도 그 위상을 유지한 집단은 없었습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여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획한 집단이 다음 시대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와 너무나도 바뀐 사회환경에 절망하기보단, 현재를 인지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해 나간다면 지금 시대의 생존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끝으로, 남자의 인생은 서른부터 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말처럼 저도 이제 시작입니다. 파이팅입니다!(웃음)<이태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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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균